인터뷰 윤석화

연출자로, 배우로, 엄마로 강인함과 향기 품은 ‘돌꽃

글 : 이일섭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   사진 : 박재형

언제나 마흔넷일 것 같던 배우 윤석화가 올해로 육십 대의 절반을 꺾게 됐다. 섬세한 감정선을 지켜내는 배우이자 문화예술계의 리더로 고군분투했던 그녀가 자신이 설립했던 극장의 개관작인 <해롤드와 모드>의 연출가로 나서며 녹슬지 않는 역량을 내보이고 있다. 돌꽃이란 이름처럼 강건하고 향기로운 그녀의 오늘을 들여다본다.
돌 사이에 만개한 꽃
 
배우 윤석화는 이상의 세계를 마음속에 거느리고 있는 거대한 사람이다. 비록 그 꿈의 세계가 멀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도달하기 어려워 낙담에 빠져들곤 하지만 오늘도 그녀는 그곳에 이르려는 갈망으로 쉬지 않고 마음의 갈기를 펄럭인다. 언제나 다소곳이 웃고 명랑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지만 윤석화는 많은 과업에 도전하며 위엄을 쌓아온 단호하고 낭만적인 기질의 승부사다. 화려하고 번듯해 보이지만 실속 없는 전리품과 상처뿐인 영광이 그녀를 새로운 궁지에 몰아넣을 때도 그녀는 늘 의연하고 우아하게 그위기에 맞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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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녀는 정겨운 목소리와 부드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며 손수 끓여낸 향긋한 커피를 내놓는다. 그리고 개막을 앞두고 있는 연극 <해롤드와 모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연극배우 박정자의 시그니처 무대인 <19 그리고 80>의 일곱번째 무대인 <해롤드와 모드>는 자살을 꿈꾸는 19세 소년 해롤드가 80세 노인 모드를 만나 사랑을 느끼는 얼마간 파격적인 작품이자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아름다운 연극이다. ‘80세가 될 때까지 이 작품을 공연하겠다’고 공언했던 배우 박정자를 위해 윤석화는 요즘 연출가로 동분서주 중이다. 극 속의 모드처럼 올해 80세가 된 박정자는 10년 전부터 <해롤드와 모드>의 피날레를 윤석화가 맡아주길 요청했고 그녀는 이 의미 있는 수락을 통해 배우 박정자에 대한 존경과 우정을 표하고 있다.
 
<해롤드와 모드>(〈19 그리고 80〉)는 설치극장 ‘정미소’의 개관 작품으로(1997년) 그녀에게 새로운 연출 방향과 공연 문법을 모색하게 함과 동시에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이제는 그 자리를 내려놓은 지수 해가 지났지만 그녀는 월간 〈객석〉과 설치극장 ‘정미소’를 16년간 운영했던 발행인이자 극장장 출신이다. 상품성 제로의 공연 전문지와 연극표를 팔러 다니며 예술에 대한 포부와 경영 노하우를 함께 키워갔지만 자신의 열정이 시장의 논리에 못 미친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애인과 같았던 두 존재와 차례차례 작별을 하게 됐다.
 
그녀에게도 해롤드 또래의 아들이 있다. 불임의 고통 끝에 얻은 아들 수민은 그녀를 닮아 예민하고 예술가적 기질 또한 다분하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는 일에 열심인 점도 유사하다. 밤늦게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고 그래서 학업에는 소홀한 점이 마뜩치 않지만 자신의 10대 시절처럼 당돌하고 다정한 아들을 대할 때마다 삶의 외로움을 까맣게 잊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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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성황후>의 초연 공연 실황(1996). 이후 뉴욕 공연에 제외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지난 달 <명성황후>25주년 공연을 보며 젊은 날의 도전과 좌절이 다 아름다운 것임을 걸 절감했다. 2 아그네스에 이어 리빙스턴 박사 역을 완벽하게 창출해 내며 그녀에게 대모(代母)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다(2008). 3 ‘빅 3’, 박정자·손숙·윤석화가 한 무대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2000).
 
요즘은 박정자 선생 옆에 서 있는 오승훈과 임준혁, 두 해롤드가 수민이와 겹쳐지는 순간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처음엔 배우와 스태프에게 세련되고 미니멀한 연출론을 표방하며 여섯 시즌이나 되는 그간의 <해롤드와 모드>와 차별화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그리고 개막을 앞둔 지금은 하나의 원칙이 더 추가됐다.
 
무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자신조차 종잡을 수 없는 아들 수민이의 별남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해롤드와 모드>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연출자의 덕목이라는 점 말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되는 다양성이 이 세계를 얼마나 더 풍성하고 건강하게 만드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심신단련법은 무언가.
“기도가 내 건강의 동력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무엇을 이루게 해달라는 염원은 두지 않는다. 다만 지금을 견디게 하는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삶은 기대를 늘 저버리며 우리를 낯 모를 곳에 패대기 쳐놓곤 한다. 여기가 어디지, 이제 어떻게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남들이 보기 전에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고치는 일을 서둘러 하는 게 우리 삶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외진 길목을 빠져나올 때 느끼는 외로움과 고통, 민망함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그 괴로운 장면과 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갖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드린다.”
 
그간의 삶이 시련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비련의 주인공을 좋아하진 않지만 내게 주어진 시련을 받아들이고 헤쳐 가는 일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긴다. 나는 순수하고 의리있고 용감했지만 돌이켜보면 어리고 무모하고 경솔하기까지 했다. 두 번 생각하고 세 번 생각하는 신중한 사람이 되자고 되뇌며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리지만 그 확신들은 결과적으로 한심하고 대책없는 잘못된 선택일 때가 많았다. 사람은 늘 그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 숙고(熟考)가 이내 악수(惡手)가 되고 마는 시련의 지점들 말이다.”
 
<해롤드와 모드>가 24년 전 설치극장 ‘정미소’ 개관작이라 연출의 감회가 특별할 것 같다.
“잃어버린 ‘정미소’ 생각으로 새삼 심정이 복잡하겠다 싶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직도 정미소 극장 간판이 그대로인 건물을 지나칠 때면 이뤄질 수 없는 첫사랑을 바라보는 심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바라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사랑에도 다 유효기간이 있는걸. 유통기한이 지난 관계는 정리하는 게 옳다. 발행인이다 극장장이다 하는 지위와 기득권을 내려놓고 단출하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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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준비를 하면서 어떤 어려움과 즐거움을 대면하고 있나.
“박정자 선생님은 강하고 절대적인 배우다. 선생님의 의지와 내 뜻이 달라 충돌하면 어쩌나 무엇보다 그런 부대낌이 다른 배우와 스태프에게 전해졌을 때의 경직된 현장에 대해 염려를 많이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른답게 내 뜻을 수용해 주시고 또 상황 상황을 잘 정리해 주신다. 물론 주도권은 늘 선생님에게 가 있지만 일정 부분을 내게 맡기는 좀 느슨해진 선생님을 바라보는 일은 선생님과 나와의 돈독한 관계를 증명하는 일이어서 더 기쁘다. 무엇보다 성장하는 후배들을 지켜보는 일은 큰 기쁨이 되곤 한다. 각별하게 애정을 쏟은 신예 묘목이 어느새 신록을 만들 만큼 성장한 것을 볼 때면 내가 만든 숲을 보는 것 같아 황홀해지곤 한다.” 
 
아들 수민에겐 어떤 음식을 만들어주나.
“많은 시간을 런던에서 보낸 탓에 아들의 입맛은 영락없는 영국인이다. 런더너들이 아침에 마시는 차를 즐겨 끓여주고 스펀지케이크에 딸기잼이 둠뿍 든 자파 케이크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날 닮아서 깍두기 국물에 비빈 밥도 잘 먹고 삼겹살을 구우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먹는다. 물론 내 잔소리도 함께 삼켜야 한다. 교만해지지 마라, 너 딴엔 최선을 다했다 해도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절반 이상을 했어도 엄마나 주변에서 아니라고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겸손한 사람이 돼야 한다며 우리 엄마보다 더 심한 봉건식 대사를 줄줄이 읊어 댄다. 그게 잔소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는 사랑이라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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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1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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