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삶에 지친 사람을 위로하는 ‘늙도록 젊어 있는’ 꽃중년

배우 박상원

글 : 이일섭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   사진 : 양수열

박상원이 2017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연극 〈SWEAT : 땀, 힘겨운 노동〉의 주역으로 열연하며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한여름을 보내고 있다. 세 시간에 달하는 공연시간 내내 엄청난 집중력을 내보이며 구조조정에 내몰린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가치를 부활해 내고 있다.

레딩을 닮아가는 명동에서

 

올해로 예순둘, 배우 인생 42주년을 맞고 있음에도 박상원은 여전히 젊은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그 스스로 ‘늙도록 젊어 있는’ 모습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기 때문이다. 그가 청바지와 체크 패턴의 셔츠 차림을 잘 소화해 내는 영락없는 청년의 뒤태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배우 박상원은 캐스팅의 걸림돌이 되는 나이 드는 일에 대해 비관하기보단 관조와 희망의 시선으로 닫힌 관문을 열며 매일매일 새로운 출발을 하곤 한다. 그것이 중견배우에게 주어진 명분이자 예술과 인생에 대한 예의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는 요즈음 국립극단의 여름 무대인 〈SWEAT 스웨트 : 땀, 힘겨운 노동〉을 공연하기 위해 명동 한복판에 자리한 극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철강 산업 도시 레딩(Reading)을 배경으로 하는 이 연극은 경제적 불안정과 해고의 압박 속에서 순식간에 빈민으로 전락한 올스테드 제련공장 노동자들의 암울한 현실과 비극적 비전을 테마로 하고 있다. 코로나19 감염증에서 절감했듯 우리의 삶은 이미 세계화가 됐고 멀고 먼 러스트 벨트(Rust Belt·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 노동자들의 소외와 절망이 불경기의 벼랑에 매달려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처지와 똑같음을 목도하게 한다. 

 

배우 박상원은 ‘알맹이만 쏙 빼먹고 버려진 오렌지 껍질’ 신세가 된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바텐더 ‘스탠(Stan)’으로 분해 동료들이 희망을 찾아 나아가기를 종용한다. 연극의 주요 공간이자 등장인물의 안식처였던 그의 바는 공장이 폐쇄 되고 경제적 위기가 닥치면서 폭력적 장소로 변모하고 종국엔 그 소요 속에 휘말려 그 또한 불구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의 희생은 ‘세상이 바뀐다는 게 무엇인가’라는 생각의 고개를 들게 하며 등장인물과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점을 전해준다. 

 

포스트 코로나 영향에 놓인 서울의 전통적 상권 명동 또한 과거의 활기를 잃어가며 〈SWEAT〉의 배경인 녹슨 도시 레딩을 닮아가고 있다. 문을 닫은 호텔과 빈 점포가 눈에 띄는 거리를 지나쳐 극장을 오갈 때마다 배우 박상원은 어떻게 자신의 배역을 완성해 가야 할지 조바심이 난다. 매일 저녁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에게 저 무수한 갈등으로 가득한 논픽션으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자신의 해석과 의도가 빼곡히 덧붙여진 대본을 들여다보며 판독과 추론에 이어 상상까지 덧붙여보지만 관객과 교감할 연극적 통로를 좀체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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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을 찾아서 타고 넘어야 해’

 

욕심과 의욕은 예기치 않은 실수를 유발하게 하고 확신 없는 애매한 연기는 무대의 진정성을 훼손하며 교만은 하모니의 상승곡선을 꺾는 배우간의 충돌을 만들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침은 진실한 무대를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 어느 순간 호흡과 강약을 맞추며 정밀한 크로노그래프(Chronograph·시간을 기록하는 장치)와 같은 견고하면서도 유기적인 연기를 완성해 내게 된다. 

 

‘늙도록 젊어 있는’ 배우 박상원의 노련함은 이즈음에서 유감없이 발휘돼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과 오랜 여운이 새겨지게 된다. 그는 ‘리듬을 찾아서 타고 넘어야 해’라는 자신의 극중 대사를 모티프로  끝없는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희망을 발견해 내는 법을 전하고 있다. 실직에 의한 경제적 파탄은 이혼과 가족의 와해로 이어지는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우리를 성장하게 했던 땀과 노동의 보람을 잊지 않는 한 새로운 기회가 다가온다는 것을 예감하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맥주 거품처럼 흘러내리는 땀을 동경하게 하는 그의 연기 또한 땀의 결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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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상원이 재공연을 거듭하며 애착을 보였던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와 연극 <레인맨>의 포스터와 홍보 컷. 그리고 최근 개막을 한 국립극단의 여름 무대 〈SWEAT 스웨트 : 땀, 힘겨운 노동〉의 출연진과 함께한 장면. 박상원은 이 무대를 통해 땀과 노동의 가치를 전하며 시련 속에서 희망을 발견해 내는 일의 중요함을 전하고 있다. 7월 18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대본에 인쇄된 대사보다 본인의 메모가 더 많다.

“작가와 연출가의 영역이 절대적이긴 하지만 연극은 배우예술이지 않나. 내 생각, 내 영혼으로 대본을 채색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배우 생활을 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연기에 대한 부담은 아직도 여전하다. 그 불안을 지우기 위해 대본에 내 연기론과 호흡법을 부려놓곤 한다. 긴장을 무마하는 데 좋은 방안이며 평정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된다.”  


기름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김렛(Gimlet·진에 라임을 넣은 칵테일)으로 피로를 잊는 작품 속 제련공장의 인물처럼 배우에게도 직업적 애환이 많을 것 같다.

“배우만큼 소외의 고통에 직면하는 직업도 없지 않을까 싶다. 배우는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예정됐던 캐스팅에서 아무런 설명 없이 제외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며 밤새도록 기다린 쪽대본에 자신의 대사가 한 줄도 없는 경우도 접하게 된다. 배역이 없어 현장에서 밤을 지샌 보람도 없이 그냥 집으로 가야 하는 허탈감과 외로움은 너무나 크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잘 삼키면 더 없이 좋은 보약이 된다. 인내하고 참는 것만큼 배우에게 좋은 덕목은 없다.”


작업 현장에서 최고 연장자인 경우가 많다. 어떤 모습과 역할을  해내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나. 

“가슴에 항시 참을 인(忍)자를 새기는 삶! 그러나 생각해 보면 모두의 에고를 이해해 주는 게 참된 연장자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물론 배우의 윤리에 어긋나거나 팀워크를 침해하는 행동에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는 잔소리가 꼭 필요하다. 한 편의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서 최소한 흘려야 하는 땀의 총량과 마셔야 하는 먼지의 총량을 강조하며 후배들에게 배우의 신념에 대해 조언해 줘야 한다. 그러나 내 라떼의 맛이 탐스러운지 후진지를 살피는 검열은 꼭 필요하다. 후배들이 스위티함을 못 느낀다면 바로 사장시키는 게 옳다.”


3시간에 이른 러닝에도 피로한 기색이 없다.

“어제, 오늘 무대에 오르기 전 공진단을 먹었다. 녹용과 사향의 기운이 연기에 도움이 됐겠지만 나를 염려하는 지인의 따스한 마음이 더 큰 힘이 된다. 내가 맡은 배역인 ‘스탠’ 또한 등장인물 모두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온화하고 다정한 인물이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표정을 주시하며 살피는 모습은 앞으로의 내 삶에 커다란 지침이 된다. 네 마리의 말과 수레가 잘 달리게 하는 린치핀(Linchpin)과 같은 기능을 내 몸에 지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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