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 정희태

소금처럼 없어서는 안 될 조연… 작은 배역을 더 사랑하는 큰 배우

글 : 이일섭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   사진 : 이경호

‘명품 조연 정희태’라는 정의는 오류다. 그는 가장 세차고 여유로운 연기 철학을 갖고 있는 배우다. 안광을 빛내는 악역도, 착하고 물러터진 심약한 인물도 그의 영혼이 실리면 좀 더 입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인물로 되살아난다. 지천명知天命에 접어드는 배우 정희태의 젊고 건강한 일상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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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하고 느긋한 프로필 

 

우리 시대의 배우, 정희태가 보여주는 가장 큰 매력은 자연스러움 속에 노련함을 숨기고 있는 데 있다. 그는 주연 배우가 아닌 조역을 통해 성장한 배우다. <하얀 거짓말> <미생> <내 마음의 꽃비> <미스터 선샤인> <흉부외과:심장을 훔친 의사들> <청일전자 미쓰리> 그리고 방영이 막 시작된 화제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그는 수많은 선과 악을 일상적이면서 자연스럽게 연기해 내며 평범함으로 가장한 심층적인 배우의 베일을 드리우곤 한다. 

 

“네”라는 대사 한마디에 애증과 연민, 권태를 담아낼 줄 아는 그는 사실적인 외양의 철저함과 함께 그럴듯한 성격의 깊이를 만들어내며, 그 인물이 이럴 것이라는 추측과 상상에 앞장서서 우리를 이끌어 간다. 하지만 그뿐이다. 예고 없이 등장해서는 주연 배우가 잘 보일 수 있도록 옆에 서 있다 이내 물러서는 그에게 우리는 새로운 궁금증과 또 다른 허기를 느끼게 된다.   

 

24년에 이르는 꽤 오래된 배우 인생을 달려왔지만 그의 실체와 속내에 대해선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큰 키에 반 곱슬머리, 하얀 살갗 위로 솟아오른 정돈된 수염을 빼면 그의 정체에 대해 감을 잡기가 어렵다. 한 시간 넘게 인터뷰를 해봐야 새된 경상도식 억양을 울림이 담긴 중저음의 끝에 매달아 놓았다는 것만 알 뿐이다. 용龍은 보이지 않고 자욱한 용의 입김만 보는 식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극 속의 주동 인물보다 좀 복잡한 존재이며 좀처럼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면면을 갖고 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자신만의 뒷전에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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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사랑하는 만큼 산다

 

그는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희태熙泰로 오랜 무명 시절을 견디며 배우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더욱이 아버지는 그가 배우가 되는 데 더욱 근본적인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젊은 시절 극장 간판 화가로 일했던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시민·명보·천도로 이어지는 울산의 극장가로 외출하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생에 불과한 그에게 클라크 게이블과 나탈리 우드,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빛나는 필모그래피를 들려주며 그의 꿈을 배우로 결정짓게 하는 추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를 존재하게 한 것은 활기차고 다소곳한 아내다. 충무로가 인정할 만한 이상형의 용모는 아니지만 배우에 대한 소명의식과 긍지가 남달랐던 그의 파란 눈빛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불안정한 그를 대신해 너끈히 세 아이를 키우며 그의 버팀목 노릇까지 하고 있으니 그보다 아내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곱절인 건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내의 바람을 위해서라도 배우라는 천직에 더 매달리며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끝없는 모험과 몽상 속에서 배우라는 일을 더욱 사랑하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극을 통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알게 됐고 상대 배역이 어느 지점에서 더 크게 반응하는지를 감지하며 배우만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직업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   

 

몇 년 전만 해도 <재벌집 막내아들> 같은 스타들이 즐비한 구역 안에선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짧게 숨을 내쉬면서도 얼마든지 편안해질 수 있게 됐다. 너무 강하고 너무 특별한 그들의 개성과 재능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 이상의 배우적 열망을 갖고 있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분명해진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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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내가 들려준 말 중 의미심장하게 느끼는 건 무언가?

“요즘 <가면산장 살인사건>이라는 연극을 하고 있다. 연극을 보러 왔던 아내가 오랜만에 내 연기에 대해 평을 해주었는데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마실 것 좀 갖다줘’라는 내 대사가 평소 내 말투와 똑같아서 반가웠다고 했다. 사실 내 본래의 목소리는 좀 높고 갈라지는 편인데 울산식 사투리 특유의 높낮이가 더해져 그 불안정함이 더 크게 부각되곤 한다. 어릴 적엔 가족들과 친구들로부터 염소가 우는 소리를 낸다며 놀림을 당하곤 했는데 내색은 안 했지만 내겐 큰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배우 수업을 받으며 사투리가 교정되고 목소리의 톤을 낮추면서 울림도 생겼지만 얼마간은 인위적인 음색이라고 볼 수 있다. 평소의 내 목소리로 좋은 연기를 하는 게 숨은 바람이었는데 아내는 용케도 그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을 꼽는다면?  

“어머니가 아닐까 싶다. 낭만적인 기질을 갖고 있던 아버지는 청년 시절엔 극장에서 입간판을 그리셨고 내가 태어나면서부턴 미포에 있는 선적 도장 현장에 나가 일을 하셨다. 그 후 사업에 손을 댔다 실패해 가세가 크게 기울게 됐고 집은 늘 채권추심으로 엉망진창이 되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나와 내 동생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어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직장을 얻어서 든든한 가장 역할을 대신해 주길 고대했지만 극단을 전전하는 무명배우가 되어 속을 무던히도 끓여드렸다. 생활력 강한 어머니가 쏟아내는 엄혹한 지적과 염려, 심약해 보이지만 그 뜻을 따르지 않는 나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지만 어머니의 뜻을 헤아리며 내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은 분명 오늘의 나를 만든 도약대이자 커브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무언가.

“극장으로 촬영장으로 가는 동안 ‘너 자신을 믿어라’는 주문을 외곤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준비하고 연구해 온 것을 완벽하게 표출해 내는 게 아니라 상대의 연기에 대해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점이다. 특별한 집중력과 호흡을 요하는 기술인데 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단계다. 예전엔 드세고 강한 상대 배역에 눌려선 안 되겠다 싶어 더 발악을 하곤 했는데 상대의 거대한 힘에 자연스레 나를 올려놓으면 더 큰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오십 세가 된다. 언제 자신의 나이를 절감하나.

“꼰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후배들 앞에서 조심조심할 때, 혈관질환이 생겨 커피콩에 있는 기름마저 두려워 드립커피만을 찾을 때, 오십견과 팔꿈치 통증이 속출해 연극만큼 좋아했던 야구를 포기하고 스크린 골프장에서 고만고만한 스크래치들과 낄낄대고 있을 때, 늘 젊고 강하다고만 여겼던 어머니에게 지팡이와 휠체어가 요긴한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자신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대상은 무언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다. 본래 간첩처럼 집에 숨어 있는 걸 좋아하는데 외로움이 습격한다 싶으면 혼자 있지 않으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지난 주말엔 장생포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겠다고 이 와중에 대구까지 내려갔다 왔다! 내 부재를 감당하느라 아내가 꽤나 화가 났지만 막상 돌아오니 별말이 없었다. 외로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내 나름의 고투임을 알고 있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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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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