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① 김신영

가라앉는 <전국노래자랑> 살려낸 유쾌·훈훈한 ‘일요일의 막내딸’

글 : 김은경 조선일보 기자  |   사진 : 양수열 C영상미디어

송해의 실로폰을 물려받은 김신영의 키는 그보다 더 작다. 문턱이 낮고 어딜 가나 있을 법한 그 편안함이 송해의 빈자리를 채우는 동력인 듯싶다. 더구나 그녀는 <전국노래자랑>의 전통에 젊은 기운을 더하고 있다. 거실의 TV가 예전만큼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OTT의 시대, 그녀는 온 가족을 TV 앞에 모이게 하며 유쾌하고 건강한 일요일을 만들어내고 있다.

2311_09.jpg


송해 후임, 생각할수록 절묘한 ‘신의 한 수’


1927년생 송해가 34년간 일궈놓은 ‘공감과 섬김의 무대’를 1983년생 김신영이 이어받은 지 꼭 1년이 되고 있다. 키가 작은 희극인이라는 점 외에 둘은 이렇다 할 연결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지난 1년간의 <전국노래자랑>을 지켜보면 둘은 닮은 점이 많은 사이라는 걸 알게 된다. 어르신께 큰절을 잘하고 아이들을 유독 예뻐하며 어느 누구와도 유쾌하게 소통할 수 있는 탁월한 반응 능력이 둘의 공통점이다. 어색하고 민망한 상황마저 웃음으로 돌려세우는 송해의 친화력이 그녀에게 유독 많은 것을 발견하게 한다. 


김신영은 ‘뼈그우먼’ 소리를 듣는 몇 안 되는 개그우먼이다. 김신영 안에 다른 김신영이 득시글하다는 뜻이다. 어렸을 적 가난으로 이사만 60번. 청도 할머니댁에 맡겨져 경상도 사투리를, 외할머니에게는 목포 사투리를 물려받았다. 그녀에게는 일곱 살 꼬마부터 백반집 아줌마까지 수많은 보통 사람이 들어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고 성별과 나이도 넘나든다. 그녀의 사람 흉내는 분명 극사실주의다. 걸걸한 아저씨부터 꼬부랑 할머니까지 실감 나게 흉내 낼 수 있는 건 육성회비를 못 내던 어린 시절, 학교 대신 길바닥과 시장통으로 등교해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한 덕분이다. 이처럼 삶의 그늘과 깊이를 아는 그녀가 ‘일요일의 막내딸’로 등장한 데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순리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주도 그녀는 실로폰을 들고 전국 장삼이사의 인생 노래를 들으러 간다. 얼마간 촌스럽고 또 원색적인 그 무대에서 스펙터클한 인생을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2311_09_2.jpg
김신영은 영화 <헤어질 결심>에 출연하며 개그우먼의 영역을 배우로 확대하는 쾌거를 이뤘다.

 

결핍이 나의 힘


평생을 코미디언만으로 살 것 같던 그녀가 지난해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주인공 해준(박해일)의 후배 형사를 연기했다. 박 감독은 김신영을 두고 “탁월한 천재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박 감독이 보내온 시나리오를 대하면서 김신영은 자신 스스로를 가둔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일에 큰 희열을 느끼게 됐다. 처음엔 코미디언인 내가 이 영화에 어울릴까 하며 주저했지만 스스로 치뜬 의심의 눈초리를 내려놓자 촬영은 수월하게 마무리됐다. 이 경험은 송해와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 결전지(決戰地) <전국노래자랑>으로 출정(出征)하게 하는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만든 한계를 스스로 깨뜨리기 위해 <전국노래자랑>의 MC가 된 것이다.     

 

2311_09_3.jpg
김신영의 <전국노래자랑> 데뷔 무대인 2022년 9월 3일 대구 달서구 녹화 현장. 그녀에게도 5천만 한국인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이변과 쾌거가 점철된 무대다.

 

송해는 실로폰으로 인생을 말했다. ‘땡’을 받아보지 않으면 ‘딩동댕’의 정의를 모른다고, ‘땡’을 받고 사정하는 참가자에겐 땡, 땡, 땡을 더 치고는 세 번 합치니 ‘딩동댕’ 아니겠냐고 했다. 김신영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저뿐이겠나요, 누구에게나 결핍과 시련은 있어요. 그리고 그 괴로움이 인생의 자양분이 되죠. <전국노래자랑> 부천 예심에 1,200분이 오셨어요. 무대가 간절하든, 누군가에게 전할 진심이 간절하든, 제일 간절한 열여섯 팀이 본선에 가거든요. 제가 직접 실로폰을 치진 않지만 전국을 돌면서 그 절실한 모습을 만나보고 싶어요. 그 뭉클함이 인생을 넓고 깊게 만드니까요.”

 


2311_09_4.jpg

 

1년 전 <전국노래자랑> 첫 무대에서 느낀 소감을 기억할 수 있나요.

“당연하죠. 무더위가 여전한 대구였는데 중압감이 말도 못 했어요. 그렇게 오래도록 마이크를 잡아왔고, 더 많은 사람 앞에도 서 봤는데 <전국노래자랑>은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한일전에 나서는 축구 대표팀이 이런 기분일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이제 막 1년을 넘긴 소회는 어떤가요.

“어휴, 아직 돌아보고 말고 할 여력이 없어요. 매주 새롭습니다.”


그래도 촬영하면서 느끼는 게 많을 것 같은데요.

“송해 선생님께서 <전국노래자랑>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다는 걸 매번 느껴요. 사랑이 아니면 이 일 못 해요. 일단 스케줄이 극악무도하고요(웃음). 너무 덥거나 추울 땐 촬영을 못 하니까 요즘 같은 때 일주일에 두 번 촬영하는데, 대본이 전날 오후 5시쯤 나와요. 대본이 적힌 큐카드나 모니터는 아예 없고요. 그냥 그 현장에 완전히 녹아들어서 같이 울고 웃고. 사랑 말고는 형용할 길이 없어요.”


송해 시절 10% 안팎이던 시청률엔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오고 있어요.

“제가 송해 선생님의 입담, 진행력, 인생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자칭 ‘일요일의 막내딸’이고 좀 부족하지만, 가족들 관심 속에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집에 막내딸이 오면 일단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잖아요. 얼마 전에 서울 도봉구 촬영이 있었는데 녹화 중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방청 오신 분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니까 회색 플라스틱 의자가 점점 많이 보이는 거예요. 녹화 중단하고 내일 다시 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그래도 아직 앉아 있는 분들이 계셔서 마이크를 수건으로 감싸고 비트박스도 하고 ‘남행열차’도 불렀죠. 어떤 분은 따라 부르고, 비옷을 갖다주기도 하시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거짓말처럼 해가 비치는 거예요. 아, 이게 <전국노래자랑>이구나 싶었어요. 남아주신 분들께 말씀드렸죠. 비가 세차게 와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신영만의 <전국노래자랑>은 장차 어떤 모습일까요.

“김신영의 <전국노래자랑>으로 만들 생각은 없어요. 처음에는 잘하고 싶어 대본이 나오면 밤새 깜지를 쓰면서 외웠어요.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죠. 근데 <전국노래자랑>은 참가자와 방청객이 만드는 무대잖아요? 제가 암만 까불고 구르고 한들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혼자 100을 준비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참가자를 꼽아주세요.

“광부를 30년 하고 퇴직하신 분인데요, 태백의 마지막 광부시래요. 그동안 다른 동료들은 다 이혼을 했다는 거예요. 광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우리 아내만큼은 끝까지 나를 지탱해줬다는 얘길 하셨어요. ‘사랑합니다’ 하면서 손을 바르르 떠시는데, 진짜 인생이 거기 있잖아요!”


<전국노래자랑>의 MC가 될 수 있었던 근간은 무얼까요.

“송해 선생님도 그렇지만 코미디언의 유연한 자세가 그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상대와 소통하고 호흡하며 상황을 진행하는 경험이 많은 장르니까요. 희극 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돼 감사하게 생각해요. 대개 ‘불우한 환경’ 뒤에 ‘탓’이란 말이 붙잖아요. 저는 정반대예요. 환경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저처럼 스펙터클한 인생을 누가 살아봤을까요? 김신영은 그렇게 자랐으므로 경험 부자, 에피소드 부자예요.”


자신의 선입견을 깨칠 때 큰 희열을 느낀다고 했는데요, 돌파하고 싶은 편견이 또 있나요.

“<전국노래자랑> MC가 된 것도 벽을 깬 거라고 생각해요. 전유성 선배님도 소식을 듣고 전화로 ‘너는 항상 고정관념을 깨는 아이구나’ 하시더라고요. 음, 욕심이 있다면 저 혼자만이 아니라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 지평을 넓히고 싶어요.”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 카카오톡
  •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23년 11월호
    이번달 전체 기사 보기